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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회 테이스팅 세션 - 시간을 마십니다. 보르도 빈티지 와인 열전. 본문

테이스팅 세션

제 20회 테이스팅 세션 - 시간을 마십니다. 보르도 빈티지 와인 열전.

와인비전 WSET 와인비전 2013. 10. 16. 12:51



- 즐거운 글을 쓰는 村筆婦 백경화


이번 테이스팅 세션은 마음이 좀 짠~ 합니다. 보르도 올드 빈티지 와인을 시음하는 기회였습니다. 올드 빈티지라고 하면 몇 년 정도 묵은 와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1977년생으로 올해로 서른 일곱이 되었습니다. 생일이 지났으니 만으로 해도 서른 여섯입니다. 그래도 올드 빈티지라고 하면 적어도 20년은 묵었음직한 와인이다라는 생각을 했지요. 20년 전이면 저도 아가였을 때고 이후로 20년이 지난 저는(차마 시골 아줌마라고 말하긴 참 싫네요.) 많이 변해 있으니 와인도 그 정도의 시간은 지나줘야 올드 빈티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단 말입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끝난 후 주제가 발표되고 빈티지가 공개되고 난 후에는 사실 별 느낌이 없었다가 이 글을 위해서 찍어 놓은 사진들과 당시에 느꼈던 와인의 맛과 그에 대한 감상들을 정리한 시음 노트를 정리하노라니 괜히 기분이 움찔움찔합니다. 와인 레이블에서 볼 수 있는 연도가 와인의 나이를 말해주는 것과 동시에 그 해 나의 모습들이 앨범을 넘기듯이 지나가며 나의 20대가 떠오릅니다. 

 

1. 샤토 크로크 미쇼뜨,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Chateau Croque-Michotte, Saint-Emilion  Grand Cru) 1997.


 

멤버들의 평점 90점, 제 점수는 87점. 

한 번에 많은 향이 느껴지는 와인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향은 신선한 토마토와 같은 채소류의 향이었습니다. 더불어 높은 산도와 부드러운 탄닌이 이 와인에게서 받은 첫 인상입니다. 컬러는 벽돌색을 지나 갈색에 가까웠으며 병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찌꺼기도 상당해서 잔에 따라 놓고서도 와인은 탁해 보였습니다. 지난 시간 자연주의 와인들을 경험한 멤버들은 이번 주제는 혹시 '넌-필터링(non-filtering)'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잔에 따르고 약 1시간 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의 휴식 시간. 당시에는 이미 네 가지의 와인을 시음한 후였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무엇이냐는 멤버들의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중 누군가 "첫 번째 와인에서 커피 향이 나기 시작해." 하는 순간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빠르게 첫 번째 잔을 집어 든 멤버들은 이후 "얘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는 볼멘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이어 두 번째 잔에서도 같은 향이 나기 시작한다는 누군가의 소리에 "오늘은 두 가지씩 짝을 지어서 각각 다른 와인이 나오나?" 하는 추리까지.

이 와인에 대한 총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향으로는 신선한 채소 향과 마치 코티 분 냄새와 같은 꽃 향기가 느껴지면서 살짝 자극적인 스파이시도 느껴집니다. 이후에 느껴지는 과일 향은 덜 숙성한 과일을 말린 듯한 느낌이었으며 이와 함께 나무의 향이 섞여 섬세한 풍미가 났지만 복합적인 풍미라고 하기엔 부족했고, 여운 또한 중간 이상이었으나 좋은 점수를 받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부드러운 탄닌과 신선한 산도, 깨끗하고 가벼운 질감, 강한 알콜 기운 등의 발란스는 좋았으나 무난한 정도로 정리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커피 향, 토피 향 등이 나면서 처음과는 다른 풍미의 캐릭터를 보여주었지만 멤버들의 점수에 반영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1997년 저는 친하게 지냈던 남자 동기들은 다 군대에 가 버렸으며, 여자 친구들은 연애에 바빠 나랑 놀아줄 시간도 없어 외로운 해였습니다. 적성에 안 맞는 전공으로 학교 생활은 괴롭기 짝이 없었으며, 특히 비가 오는 날은 등교 길이 더 괴로워서 결석이 많아 최악의 학점을 기록했고, 학교라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다니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던 해였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렇다고 학교를 때려 치우고 나올 배짱도 없었던 제 인생의 벌레 같은 4년 중 한 해였습니다.

저의 1997년에 점수를 준다면 살아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100점 만점에 56점 정도를 주겠습니다. 


2. 샤토 데스티유,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Chateau Destieux  Saint-Emilion  Grand Cru) 1995.


 

멤버 평점 90.4점, 제 점수는 90점입니다. 

첫 번째 와인과 더불어 와인을 따라 놓은 지 한 시간 후의 휴식 시간에 커피 향이 올라왔던 와인입니다. 첫 번째 와인처럼 산도가 높았으며 탄닌 역시 첫 와인보다 강한 느낌입니다. 앞에 마신 와인의 첫 인상이 신선한 채소류의 이미지를 가진 와인이라면 이 와인의 첫 인상은 스파이시입니다. 높은 산도, 강한 탄닌, 자극적인 스파이시. 중간 이상의 여운으로 느낄 수 있는 나무 껍질 냄새 등으로 복합성이 좋다는 평입니다. 일부 멤버들은 과일 풍미가 적어 다소 낮은 점수를 주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와인이 나오면서 컬러로 보아 숙성 기간이 긴 빈티지 와인일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오래된 나무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와인일 것이라는 추측 등... 완성된 와인이든, 그 이전의 포도든 간에 시간이 깃든 와인일 것이라는 범위로 주제가 좁혀졌습니다. 진행자는 이젠 멤버들에게 어느 지역의 어떤 품종의 와인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1995년 저는 고3이었고, 수능을 봤으며, 항상 그렇듯이 영역별 편차가 심해서 입시 상담시 담임 선생님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고, 결국에는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겠다는 똥고집으로 이 학교가 아니면 절대 원서를 쓰지 않겠어요! 라고 버텼으며.. 결과는... 참담. 


3. 샤토 라 클로스리 뒤 그랑 푸죠, 물리스 엉 메독(Chateau la Closerie du Grand Poujeaux, Moulis en Medoc) 1995.


 

멤버들의 평점 90점, 제 점수는 93점입니다. 

네 가지의 와인을 테이스팅 하고 나서 잠시 쉬는 시간에 멤버들은 그날의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다가 나온 의견 중 하나가 두 가지 와인을 짝지어 서로 다른 품종이나 지역 등이 섞여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세 번째 와인의 출연이었는데 전에 시음한 두 가지 와인과는 다른 캐릭터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지속적으로 느껴지던 높은 산도는 세 번째 와인에 와서 강도가 세게 느껴졌으며, 탄닌은 보다 거칠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복합성 면에서는 앞의 두 와인들과 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앞의 두 와인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 두 가지의 캐릭터를 앞세우며 잔잔하게 다른 향들을 느낄 수 있었다면, 세 번째 와인에 와서는 여러 가지 향들이 잘 여물고 숙성되어서 어우러진 느낌의 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검은 과일류와 붉은 과일류들의 달콤한 향들의 조화와 신선한 채소향, 그리고 나무와 풀들이 섞인 향들과 스파이시 등. 향의 종류는 전의 두 와인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 조화와 강도는 크게 느껴졌고, 과일 캐릭터 향들의 크기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5. 샤토 벨-로름 트렁쿠아 드 라랑드, 오-메독(Chateau  Bel-Orme Tronquoy de Lalande, Haut-Medoc) 1999.


 

멤버 평점 90.4점, 제 점수는 90점입니다. 

첫 인상으로는 강한 스파이시를 느꼈습니다. 산도와 탄닌의 발란스가 이제까지의 와인과 비교해서 가장 좋다는 평가입니다. 첫 한 모금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부드럽지만 이후 느껴지는 탄닌의 느낌은 강한데 이것을 파워풀하다고 표현하는 멤버도 있었습니다. 목넘김 이후의 여운에서 스모키한 나무의 향과 함께 오일리함을 지적한 멤버들이 다수 있었으며 힘 있게 이어지는 여운에 좋은 평이 많았습니다. 

1999년, 세기 말의 저는 연애 중이었습니다. 


네 가지의 와인을 테이스팅 했지만 잔이 다섯 개인 이유는 중간에 상태가 좋지 못한 와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 네 가지의 와인을 테이스팅 하면서 느낀 공통점은 높은 산도와 신선함, 무겁지 않은 산뜻한 질감, 그리고 섬세한 풍미입니다. 마치 피노 누아 같은 질감이었으나 숙성된 피노 누아에서 느낄 수 있는 동물성 향과 짚내 같은 숙성향은 없었고, 산도가 높긴 했지만 그와 더불어 부드럽고 부피가 크게 느껴지는 강한 탄닌과의 발란스가 좋았습니다. 과일향이 주 캐릭터로 도드라지지 않는 와인들이었고, 오크 숙성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향들이 도드라지지 않았습니다. 와인의 컬러로 봤을 때에는 분명 숙성이 오래된 와인이라는 생각에 이번 주제는 빈티지 와인일 것이라는 멤버들의 합의가 있었지만, 어느 지역이냐는 질문에는 올드 월드일 것이라는 추측 외에 분명한 지역이 나오진 못했습니다. 

 

6. 사르제 드 그리오 라로즈, 생-줄리앙(Sarget de Gruaud Larose, Saint-Julien) 1994.


 

멤버 평점은 89.9, 제 점수는 93점입니다.

멤버들의 평점과 제 점수가 크게 차이 나는 일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이 와인은 이날 꼴찌 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점수로 보면 두 번째로 점수가 높은 와인이었습니다. 이날 제가 와인에 준 점수의 편차가 크지 않은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멤버들의 평점이 낮은 이유로 '평이한 와인'이라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보아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 테이스팅 노트를 보니 '부담스럽지 않으며 안정감이 있다. 잔잔하고 은은하며 섬세하다. 모나지 않고 우아한 와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작게는 '이제까지 중 제일 낫다.'는 메모도 있습니다. 다른 멤버들에게는 특이한 인상을 주지 못한 와인을 가장 좋게 느낀 이유는 제가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와인을 선호하기 때문인 걸까요?

1994년. 고2 때였는데 제 인생에서 자발적인 터닝 포인트를 가졌던 해였습니다.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겨울이었고,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울면서 갔는데 집에 갔더니 얼굴이 퉁퉁 붓고, 감각도 없이 얼어있었던 일이 말입니다.  


7. 샤토 오-베르제, 페삭-레오냥(Chateau Haut-Bergey, Pessac-Leognan) 1998.


 

멤버들의 평점 91.3점. 제 점수는 93점입니다.

제 노트에는 이전 와인들과는 다른 향이 느껴진다는 메모가 있고, 향에서 느껴지는 인상이 매우 좋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와인들과 다르게 저는 그것을 꽃 향기라고 기록했는데, 다른 멤버의 노트를 보니 베리류의 과일 풍미가 좋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섬세하고 깨끗한 질감은 마치 유리 장미와 같다는 표현도 보입니다.  

1998년. 여름에 저는 모 채팅 사이트에서 결혼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8. 비냐 비크, 칠레(Vina-VIK, CHILE) 2010.


 

멤버 평점 92점, 제 점수는 90점입니다. 

아이쿠.. 진행자의 개그가 돋보이는... 이 와인을 마신 후 멤버들은 모두 "뭐야?" 하는 성토가... 마셔오던 와인과는 완전 다른 아이가 나온 거죠. 다들 제대로 나온 거 맞느냐, 준비된 게 아니라 다른 게 나온 거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졌지요. 그러자 시치미를 떼는 진행자는 이게 뭐가 이상한 것 같냐고 했을 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한 마디가 나옵니다. 

"이거 까르메네른데.. 저가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하는 소리가 들리지요. 이 소리의 주인공은 접니다. 

비냐 비크는 까르메네르의 비율이 약 60% 이상. 그리고 까베르네 쇼비뇽, 멜롯, 까베르네 프랑, 쉬라 등이 블렌딩된 와인으로 칠레의 프리미엄 와인입니다. (http://aligalsa.tistory.com/851  'Cave de Maeng의 창고 속 이야기'에서 발췌.) 과일향의 풍미가 무엇보다 큰 특징이며, 강건한 탄닌과 조화를 이루며 와인의 신선함을 주는 산도의 정도까지 발란스가 좋습니다. 코르크를 오픈하고 바로 마시면 와인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한 시간 정도 브리딩 후에 마시기를 권합니다. 


9. 샤토 라베고스, 마고(Chateau Labegorce, Margaux) 1998.


 

멤버 평점 92.2점. 제 점수는 94점입니다. 멤버들의 평점도 제 점수도 모두 1등을 준 와인입니다. 

산도와 탄닌, 풍미의 발란스가 좋았으며 부드럽지만 강건한 모습의 탄탄한 구조감도 멋졌던 와인이었습니다. 

여운에서는 끊이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과일의 향이 특히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상큼한 성질을 갖고 있는 붉은 과일류의 향과 더불어 고소한 견과류의 향, 신선하게 느껴지는 나무와 허브 등의 식물성 향 등이 복합적으로 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잘 숙성되고 입체적인 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안 그런 것이 없겠지만 시간은 대상의 가치를 더해줍니다. 와인의 경우 시간은 거친 탄닌을 둥글고 부드럽게 연마시켜 주고, 단순한 향들을 숙성시켜 다양하고 복합한 향들로 변화시킵니다. 투박한 질감을 매끈하고 우아하게 정제시켜주면서 그 안에 향을 담아 줍니다. 

물론...

 

4. 샤토 페이라봉, 오-메독(Chateau Payrabon, Haut-Medoc) 1999.


 

얘는 맛이 갔음. 

시간이 좋은 와인을 만드는 전부는 아닙니다. 관리와 보관이 동반되는 경우에만 시간은 와인에 긍정적인 효과가 발휘됩니다. 사람도... 나이가 많다고 다 인격적으로 완성되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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