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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회 테이스팅 세션 - 명불허전, 그리고 화려하지 않은 고백. 본문

테이스팅 세션

제 7회 테이스팅 세션 - 명불허전, 그리고 화려하지 않은 고백.

와인비전 2013. 4. 1. 13:13


초등학교 때 백일장을 나간 적이 있다. 그때 운문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었다. 꽤 큰 대회였고, 대상은 교육감상이었는데 수상식도 화려해서 수상자들이 아주 큰 강당에서 수상식을 한 번 하고, 학교 조회 시간 때 구령대에서 상을 또 받고 그랬었다. 

당시 상을 받고 나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너무 엉뚱했다. 대상은 운문과 산문을 합한 최고의 상이었는데 수상작이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아이가 쓴 단 2행짜리 시라는 점이었다. 내 시는 기억도 안 나는데 대상작은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잠깐 소개해 보면, 


무엇을 써야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아 

연필만 꼭꼭 씹고 있다.


요렇게 달랑 두 줄이었다. 대상 작품이 발표가 난 후 어찌나 화가 났던지 어린 마음에 혹시 이 대회에는 비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피도 안 마른 머리로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었다. 

후에 나이가 들고, 문학을 공부하고, 다른 작가들의 글들도 열심히 보면서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달랑 2행짜리 시가 얼마나 기가 막힌 시인지에 대한 그 이유를 말이다. 그 시는 글에서 가장 중요한 당시 작가의 진정성이 글에 담뿍 담겨 있으며, 단 두 행이지만 불안한 듯한 리듬감이 글 전체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고, 우연이겠지만 맞아 떨어진 각 행의 각운으로 행 간의 긴장감이 살아있다.

그리고 모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에게는 '흥'이라는 잠재된 DNA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말을 하면 그게 노래가 된단다. 비록 글로 쓰여졌지만 독자들에게는 소리로 구현되고 글은 결국 생각을 담은 소리가 된다. 다시말해 진실된 글이 상대에게 공감이 되면 작가의 감정은 속삭여주는 말로 전달이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상대에게는 자연스러운 운율이 생기는 노래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거다. 

결국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달랑 2행짜리 시에서 리듬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대회 당시 어른들은 뭘 자꾸 써 내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뭘 써야할 지 모르겠는 열 살도 안 된 사내아이의 나름의 고민이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공감을 줬기 때문에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년의 심사위원들은 이 글을 보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내가 글을 쓰면서 자꾸 허세를 부리려 하거나, 글에 힘을 주고 멋을 부리려 할 때마다 "야, 야.. 정신 좀 차려! 까불지마! 아는 만큼만, 느낀 만큼만 써!"라고 채찍질하는 힘이 되어주곤 한다.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대체 이번 시음기는 뭘 어떻게 써야 할지 이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공개를 하고 시작하기로 한다. 와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헉! 하실 수도 있겠다. 이것은 바로 칠레의 맹주들이다. 사진의 왼쪽부터 본다면,

1. 산타리타 까사 레알 카버네 쇼비뇽 santa rita casa real 2007

2. 카사 라포스톨레 클로 아팔타 casa lapostolle clos apalta 2009 

3. 알타이르 ALTAIR 2005

4. 비냐 알마비바 Almaviva 2009 

5. 몬테스 폴리 Montes Folly syrah 2006

6. 코노 수르 오씨오 Cono Sur Ocio Pinot Noir 2009

7. 콘차이 도로, 까르민 데 페우모 Conchay Toro, Carmin de Peumo 2008

8. 쎄냐 Sena 2007


시음의 순서는 사진의 오른쪽부터인 쎄냐부터였다. 테이스팅은 한 가지 와인이 시음자들에게 돌아가고 정해진 시간 안에 맛을 보고 평가 기준에 맞춰 점수를 주는데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70점 대는 '줘도 안 마셔', 80점 중반부터는 '마실 만한데'로 보고 80점 후반부터 '좋은 와인이다'로 시작해 90점 대는 '훌륭하다'로 생각할 수 있다. 쉽게 로버트 파커 아저씨의 점수 기준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럼 나는 몇 점을 줬느냐... 쎄냐는 85점 줬고, 까르민 데 페우모는 81점 줬다. 뭐... 입맛은 사람마다 다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점수의 심연에는 부끄러운 이유가 있었으니... 사실 나는 이 정도의 프리미엄 와인을 마셔보고 그 맛을 기억할 만큼 경험이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와인을 마시고 그 가치를 점수로 환산해서 평가할 만큼 훈련된 후각과 미각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지도 않은 일이 있었는데 대개 시음시 와인은 입에서 굴린 후에 살짝만 목으로 넘기고 모두 뱉어내는데 그걸 꼴딱꼴딱 마시고 있더라는 거다. 처음에 두 가지 와인을 그렇게 꼴딱꼴딱 마셔버렸다. 아마 맛있어서 그랬나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가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라니 그처럼 잔인한 일이 어디있냔 말이다. 순간 어린 장금이가 빙의되어 "맛있는 와인을 보고 맛있다 하는데 왜 맛있냐 여쭈시면...." 요런 말이 막 나올 뻔 했다.

이로써 내가 괴로웠던 이유가 다 도출이 되었다. 첫째는 경험의 부족. 둘째는 기술의 부족인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와인.. 뭐.. 그깟.. 그거 술인데.. 뭐 그렇게 유난떨면서 스트레스까지 받고 그러냐?" 이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게 와인은 삶을 사는 즐거운 거리 가운데 하나임과 동시에 이제는 제대로 알고, 감히 정복하고 싶은 도전거리 중에 하나가 되어버렸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또 이렇게 말하면 "네가 와인을 얼마나 대했다고 거창하게 '도전거리'라고까지 하느냐?"이럴 수도 있겠다. 뭐... 사실 나도 이런 딴지들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라는 부사를 붙인 것이니 이 말에 대해서 뭐라하고 싶으신 분들은 그냥 속으로만 하길 바란다. 



인터넷을 보면 와인 고수들이 정말 많다. 어쩜 그렇게 눈 돌아가게 좋고, 유명하고, 비싼 와인들을 많이 경험했는지 부러워서 죽을 것 같다. 심지어 와이너리 주인들이 직접 싸들고 온 와인을 시음하는 이벤트에 초대됨은 물론이고, 이때 생긴 개인적인 친분으로 와이너리에 초대도 받아 말 그대로 산지의 정수를 느끼고 오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나 부러워서 죽을 것 같다 못해 내가 해 보지 못한 경험에 열받아 폭발할 것 같기도 한다. 그러니 이게 다 못난 자격지심이라는 녀석의 유치하고 못된 장난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막상 좋은 와인들을 한 자리에서 시음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와인들을 자주 접하지 못한 이유로 그 맛을 기억할 수 있을만한 경험의 부재에 대한 열등의식과 자책밖에 없었음을 다시 고백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과연 이 와인들을 시음한 내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데... 어떤 글을 쓰든지 간에 내 집필 스타일은 간단하다. 상황에 대한 순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켜서 이야기의 구성을 만들고, 에피소드를 정리한 후에야 글로 한 번에 정리를 한다. 그런데 열등의식으로 이미 공황상태에 빠져서 상태는 말 그대로 '메롱'인데 정리할 거리가 뭐가 있겠느냐는 거다. 

함께 시음에 참가했던 다른 분들의 테이스팅 노트를 눈이 빠져라 읽어봤고, 인터넷을 뒤져서 다른 고수들의 시음기를 모아 보기도 했으며 각 와인의 히스토리도 열심히 정리했다. 그리고 마치 내 마음인 양, 내 글인 양 잘 버무려서 꾸며 써볼까 했는데 그게 내 글이 아니니까 마냥 부끄럽기만 하더라.

1. 쎄냐 2007. 

WS 90점. / RP 95점을 받은 와인이고, 테이스팅 세션 멤버들에게서는 평균 88.3점을 받았다. 나는 85점을 줬다. 처음부터 맛있는 와인이라면서 꼴딱꼴딱 잘도 넘겼으면서 85점을 줬다. 


2. 콘차이 토로 까르민 데 페우모 2008.

2008년의 경우 WS 92점, RP 97점. / Wine&Spirits 95점. 2003년 처녀빈 RP 93점. 이후 RP 95점 이상. 테이스팅 세션 멤버들의 평균은 89.4점. 나는 81점 줬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모두 무지의 소치임을 거듭 고백하는 바이다. 

까르미네르가 무려 90%. 까베르네 쇼비뇽이 8%, 쁘띠 베르도와 까베르네 프랑이 각각 1.5%와 0.5%. 칠레 저가 까르미네르를 줄창 마셨으면서도 이 녀석이 어떤 품종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아이가 잘 만들어진 까르미네르의 '좋은 예'였다는 점 때문이다.


3. 코노 수르 오씨오 피노누아 2009.

•REGIONAL CHILE PINOT NOIR OVER £10 TROPHY - DECANTER WORLD WINE AWARDS 2006


•PINOT NOIR OF THE YEAR- GUÍA DE VINOS DE CHILE 2006


•SILVER - INTERNATIONAL WINE CHALLENGE 2006


•SILVER - CHALLENGE INTERNATIONAL DU VIN 2006


•OUTSTANDING - GUÍA DESCORCHADOS 2006 



이러한 수상 내역을 갖고 있는 와인이고, 테이스팅 세션 평균 점수는 88점. 나 역시 89점. 기특한 것이 나도 부지런히 와인을 마셔서 경험을 쌓으면 뭔가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위로 준 와인이었다. 마셔보고 다행히 피노 누아인 줄 알았고, 그에 대한 기준으로 와인에 점수를 줄 수 있었으니 개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몬테스 폴리 시라 2006.

2005년 WS 94점. 테이스팅 세션 멤버들의 평균점수 92.8. 나는 90점. 참고로 이 와인에 97점을 준 멤버는 세 명. 96점은 한 명. 93점은 세 명이었다. (당시 멤버는 총 13명.)


5. 알마비바 2009.

2006년의 경우 WS 93점. RP 92점/ 2003년 WS 95점, RP 95점/ 2004년 WS 93점. 테이스팅 멤버 평균 점수 93.3점. 나의 점수 92점. 

6. 알타이르 2005.

2004년의 경우 RP 94점. 2005년, 2006년 와인 스펙터 선정 세계 100대 와인 중 4위. 테이스팅 세션 멤버 평균 93.2


7. 까사 라포스톨레 클로 아팔타 2009.

2005년 와인 스펙터 96점 / 2008년 100대 와인 1위 / 2006년 와인 스펙터 94점. 테이스팅 세션 평균 점수 93.3점. 나의 점수 94점.


8. 산타리타 까사 레알 카베르네 쇼비뇽 2007.

테이스팅 세션 멤버 평균 점수 90.2점. 나의 점수 94점.


각 와인의 등수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순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카사 라포스톨레 클로 아팔타 casa lapostolle clos apalta 2009 / 93.3점

1. 비냐 알마비바 Almaviva 2009 / 93.3점

3. 알타이르 ALTAIR 2005 / 93.2점

4. 몬테스 폴리 Montes Folly syrah 2006 / 92.8점

5. 산타리타 까사 레알 카버네 쇼비뇽 santa rita casa real 2007 / 90.2점

6. 콘차이 도로, 까르민 데 페우모 Conchay Toro, Carmin de Peumo 2008 / 89.4점

7. 쎄냐 Sena 2007 / 88.3점 

8. 코노 수르 오씨오 Cono Sur Ocio Pinot Noir 2009 / 88.0점


옛말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했다. 이유 없이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없다는 말인데 이번 테이스팅이 딱 이 말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도 분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했고, 충분하지 못한 경험과 훈련되지 않은 테이스팅 기술을 가지고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을까 하는 아픈 열등감도 느끼게 된 시간이었지만 정말 필요한 시간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이벤트가 아니면 이 와인들을 죽 늘여놓고 시음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몹시도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거 조금 간지럽긴 하지만 이번 테이스팅 주제를 고민하셨고 기획해 주신 기획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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