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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테이스팅 세션 - 피노 누아 어디까지 마셔봤니? 본문

테이스팅 세션

제 5회 테이스팅 세션 - 피노 누아 어디까지 마셔봤니?

와인비전 WSET 와인비전 2013. 3. 26. 11:45


즐거운 글을 쓰는 村筆婦 백경화

작년 연말 음용 기간이 한참 지난 샹볼 뮤지니를 마시고는 향은 다 빠져나가 버려 이것은 차라리 빨간 소주라고 하고 싶은 그 맹맹한,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스파이시한 향내만 남은 버려도 시원찮을 피노 누아를 맛보며 갑자기 떠오른 이미지. 그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 나오는 주인공의 어머니였다.

분명 고급품이지만 닳아버린 오래된 기모노를 단정하게 입고, 하얗게 쇤 머리카락을 목덜미가 보이게 빗어 올린 몰락한 귀족 여인은 봄 한 철 여린 바람에 하릴없이 날리는 벚꽃잎을 바라보며 처연한 장면을 연출하는데 기운이 다 빠져버린 샹볼 뮤지니는 그 귀족 여인을 생각나게 했다. 물론 이후에는 3개월 무이자로 결제한 영수액과 화려한 말솜씨로 와인을 팔아먹은 그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밀스럽고, 우아하며, 귀족적이고, 섬세한. 매우 클래식하고 보수적인 이미지의 와인이 내가 생각하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다. 연말 모임 '99 알렉스 꼬르똥을 오픈 후 첫 향을 맡은 한 분이 "아,... 이건 좀 느끼한데.." 라고 했을 때 잔뜩 멋을 부린 목소리로 "그게 바로 잘 숙성된 부르고뉴 피노 누아에서 느낄 수 있는 미티함이죠. 우아한 숙성미랄까요?" 상당히 재수없는 발언이긴 하지만 피노 누아는 그래도 될 것 같다.

이름도 Pinot Noir. 프랑스인처럼 비강에 바람을 한껏 넣어서 '피노 누우와아~' 하고 발음을 해 보면 고전적인 프랑스 여배우가 된 것 같은 야릇한 느낌도 든다. 

물론 상큼한 과일 향기가 싱그러운 어린 피노 누아의 살랑거리는 멋도 매력있다. 햇볕이 좋은 오후, 여자 친구들과 살짝 차게 칠링한 피노 누아를 가벼운 식사와 함께 예쁜 척하고 마시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여리고 달큰한 붉은 과실의 향이 살랑거리고, 단단하지 않은 탄닌과 새콤한 산미가 좋은 어린 피노 누아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까르르 웃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수다 자리에 잘 어울리는 메뉴이기도 한 것이다. 

박찬일 셰프가 그의 저서에 '젊은 여자들이 시큼하고, 떫은 피노 누아를 마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을지라도 시큼하고, 떫어도 피노 누아이기 때문에 괜찮다. 그런게 아직 덜 성숙한 피노 누아니까. 여하간 피.노.누.아. 라면 괜찮다. 왜냐하면 피노 누아니까. 나의 무한한 편애 속에서 피노 누아란 어린 것은 살랑거리는 봄바람 같고, 숙성된 것은 비장감마저 흐르는 우아한 이미지를 가진 와인이다. 그래서 비싸도 괜찮다. 적어도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말이다.

2012년 1월 와인 리퍼블릭의 테이스팅 세션. 깨끗하게 정돈 된 여덟 개의 와인잔. 아직 어떤 와인들을 마시게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출전을 준비하는 와인들은 보라색 봉다리를 뒤집어 쓰고 자기를 완벽하게 감춘 채 조용히 대기 중이다. 몇 번의 경험이 있는 유경험자들은 오늘은 어떤 주제로 테이스팅이 될 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처녀 출장을 하는 세 사람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손에서는 땀이 나서 손수건을 쥐었고, 남들 눈이 미치지 않는 테이블 밑에서는 다리가 달달 떨렸으며, 가슴은 콩닥콩닥... 아,.. 무식해서 용감해지지는 말아야 할텐데.. 하는 걱정도 산만큼이나 크다.

와인의 색과 향, 입안에서의 느낌들을 집중해서 관찰한 후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는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 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와인이 한, 두 모금 더해지면서 무식해서 용감해지는 상황이 마구 발생했다. 첫 경험은 용감했다. 

이 날의 선수들. 몽땅 다 피노 누아란다. 햇살 좋은 오후에 차갑게 칠링해서 시큼하고 떫더라도 피노 누아니까 까르르 웃으면서 즐겁게 마실 수 있는 것들이 어깨를 마주 걸고 여덟 명의 선수가 되어 출전해 주신거다. 황공하기도 하여라.. 그리고 아쉽기도 하여라.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피노 누아인지 아니면 피노 누아에게 덧입혀진 환상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피노 누아라는 이름 하에 개별 와인의 본성보다 훨씬 크게 자리잡은 과할 수도 있는 이미지가 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 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 

자,. 그럼 깜찍하게 자기를 숨기고 출전했던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 YERING. 호주 야라밸리의 피노 누아. 평균 84.6점으로 공동 5위를 했다.

강하지만 경쾌한 산도와 이에 비해 탄닌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과일향이 도드라지며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밸런스를 갖췄다. 대체로 붉은 과일류의 향과 스위트 스파이시, 젖은 식물성 향과 오크, 흙향을 내뿜으며 부드럽고 묽은 느낌이 있으나 강한 산도의 영향으로 생기가 있고 구조감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한 느낌을 받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아한 향으로 변한다.


2. Cono Sur. 칠레 센트럴 밸리의 피노 누아. 평균 86.8점으로 전체 2위를 했다.

두드러지는 산도와 부드럽지만 다소 힘이 느껴지는 탄닌. 과일향의 조화로 전체적인 밸런스는 좋으나 바디감은 약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탄닌과 산도의 조화로 탄탄한 구조감을 지녔다. 복합성에 있어서는 떨어지지만 여운은 중간 이상으로 길었으며 붉은 과일류향과 식물성 향에 스모키함과 미티함. 오크 숙성에서 오는 바닐라향과 토스트향 등이 난다.


3. DOMAINES SCHLUMBERGER. 프랑스 알자스 피노 누아. 평균 84.5점으로 전체 7위.

거친 산도와 약한 탄닌과 향은 밸런스 뿐만 아니라 구조감도 약했으며, 강도는 강하긴 하나 좋은 느낌은 아니라는 의견들. 여운은 중간 정도였고, 투박한 복합성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붉은 과일향이 지배적이었고 덜 익은 과일향이라는 표현이 많았다.


4. TOHU. 뉴질랜드 말보로 피노 누아. 평균 84.6 점으로 전체 공동 5위.

산도와 탄닌. 그리고 향까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전체적인 밸런스는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살짝 탄산이 느껴진다는 의견과 좀 달큰한 맛이 난다는 의견도 있었다. 산뜻하고 약한 강도와 부드러운 느낌을 가지며 구조감은 중간 이하라는 평가. 딸기, 체리, 구운 아몬드, 바닐라, 블랙베리 등의 향과 피망같은 식물성향을 비롯해 감초와 캬라멜 등 단 향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5. 미국 캘리포니아의 THE PINOT PROJECT. 평균 83점의 순위는 8위.

중간 이상의 거친 산도와 탄닌. 끈적거리는 느낌. 산도는 높고 탄닌은 낮아 깨진 균형감과 허술한 구조감. 입에서는 산뜻하나 쓴 맛으로 향이 가려진다는 의견과 복합적인 성격을 보이지만 인상적이지는 않아 단순하다는 평가.


6. ERATH. 미국 오레곤 주의 피노 누아. 평균 84.7점에 전체 4위.

두드러지는 산도와 약한 탄닌. 스케일은 작지만 나쁘지 않은 밸런스를 가졌다는 평가. 구조감에 대해서는 상이한 의견이 많이 나왔는데 '구조감이 약하다.'와는 반대로 '강한 구조감을 갖는다.'는 의견. 그리고 '세련된 구조감을 갖고 있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산뜻함과 가벼운 강도. 그리고 중간 정도의 여운. 주로 딸기와 체리 등의 붉은 과실류의 향과 향신료의 향이 난다는 의견이 많았고 가죽과 삼나무 향이 난다는 의견. 풍미는 좋으나 개성이 없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라고 정리할 수 있음.


7. LE GRAND Pinot Noir. 프랑스 랑그독 피노 누아. 평균 87.5점으로 1등이다.

중간 이상의 기분 좋은 산도와 부드러운 탄닌이 중심을 잡아주며 전체적으로 좋은 밸런스를 갖췄다. 처음엔 단단하게 느껴지나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이는 탄닌보다 산도의 힘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산뜻한 느낌과 강한 향. 그리고 맛의 강도가 좋았으며 복합성에서도 우수하다는 평가가 전반적이었다. 기분 좋고 긴 여운이 남으며 주로 검은 과실의 풍성한 풍미와 스위트 스파이시, 아몬드, 토스트의 향이 난다.


8. DOMAINE FAIVELEY MERCUREY. 평균 85.3점에 순위는 3위다.

높은 산도와 낮은 탄닌이 부드럽게 녹아 있어 여린 듯하나 밸런스는 좋다. 구조감과 복합성. 여운에 있어서까지 모두 중간 정도의 평가를 받았고, 강한 힘과 생생한 느낌을 갖고 있는 와인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라즈베리, 크랜베리 등 여린 붉은 과일류의 향과 감초, 버섯, 피망 등의 식물성 향. 오크와 삼나무 향도 느낄 수 있었다.


개성있게 만들어진 여덟 병의 피노 누아. 레이블을 하나하나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니 맛의 이미지들이 새롭게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좋은 느낌으로 남은 '예링'과 '코노 수르'. '그랑 피노 누아'의 경우는 친구들과 가볍게 즐기며 호들갑스러운 수다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벚꽃 놀이를 핑계삼아 바리바리 싸들고 야외 낮술의 메인 테마로 삼아 보리라.

그리고... 피노 프로젝트. 뭔가 비어있는 듯한 맹한 맛을 갖고 있으며 개중 꼴찌를 한 주제에 가히 혁명적인 느낌을 주는 레이블이라니... 저 레이블을 보고 있노라면 베레를 쓰고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체 게바라의 사진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이름도 비장한 피노 프로젝트! 그래서 재밌는 이 와인은 도발적이고, 일탈의 충동을 느낀 어느 날 생각이 날 것 같다. 아주 보수적인 찻집. 찻잔도 주인의 취향대로 골라 수집된 앤틱잔으로만 서브를 하는 그런 찻집에서 과감하고 거칠게 따서 준비한 머그잔에 콸콸 따라 놓고 벌컥벌컥 마신 후 혹시라도 불편한 눈치를 보이는 주인에게 어색하게 '난 둘 돠!'를 외치는 베컴처럼 살짝 느끼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한 마디 날려보고 싶다.

"피노 프로젝트!"

마지막으로 정말 용맹무쌍한 나를 만나게 해 준 패블리. 모두가 "이것은 피노다!"라고 할 때 정색을 하고서는 "피노는 아닌 것 같은데요."라며 용맹함을 떨쳤고, "그럼 무엇 같으냐"라는 물음에서는 비겁하게 배시시 웃으면서 "그건 모르겠는데요." 했던... 앞으로는 피노 누아 좋아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의 용맹함을 충무 정신과 견주어 보고자 이 역시 날이 따뜻해지면 집 앞 현충사 마당에서 돗자리 하나 깔아 놓고 기욤 뮈소를 들고 뒹굴다 와야 싶다. 기분나면 몰래 충무공께도 맛 보여 드리고, 먼지 피우면서 뛰어다니는 꼬마 애들 앞에서 대장 노릇도 해야지. 판타지와 현실의 묘한 조화라니.... 아, 이거 정말 기욤 뮈소스러운데.....

오는 봄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살짝 가벼워지고 싶다면 어린 피노 누아의 떫고, 새콤한 맛을 느껴보는 것도 상쾌한 경험이 될 수 있다에 한 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분 좋은 이미지 쯤은 백만번이라도 덧씌워 즐겨도 좋을 것 같다. 와인은 그렇게 마시라고 만들어진 음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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